2023년 6월 25일 쉴만한 물가 교회 주일 예배
마가복음 12:41-44
두 렙돈의 헌금의 비밀을 아세요?
마가복음 12장에서 기록되어져 있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관련된 내용 중에서 마지막 부분은 남편을 잃은 가난한 여인의 두 렙돈의 헌금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들이 여러 번 생각해 본 것처럼, 마가복음 12장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의 비유(막 12:1-12)를 통하여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의 내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막 12:13-17; 18-2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금과 관련된 질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하여 가르치셨고, 부활에 관한 질문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지식으로 제한하고 있는 문제점을 언급하시면서 죽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지 못하며 우리들의 죽음이 우리들의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 중 한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마가복음12장 35-44절의 말씀에는 세 가지 내용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12:35-37: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
12:38-40: 서기관들의 외식
12:41-44: 가난한 과부의 헌금
그러면 남편을 잃은 가난한 여인의 두 렙돈의 헌금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고,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신 내용은 헌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신 것인지, 또는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언급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1세기의 종교 지도자들이 강요했던 잘못된 헌금에 관한 생각들을 유추해 보면 1세기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에 드리는 헌금을 강요하고 있었고, 그들은 많은 헌금을 드리는 부자와 가난하여서 적은 헌금을 드리는 남편을 잃은 여인을 공동체 안에서 차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헌금을 드리는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이 말씀이 부담이 되는 이유는 비록 두 렙돈 곧 한 고드란의 적은 금액을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었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의 전부를 헌금했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두 렙돈의 가치를 생각해 보면,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 한 데나리온의 64분의 1에 해당 되는 금액으로 현대 화폐 단위로 생각해 보면 대략적으로 1불 정도의 가치입니다.
우리들은 구약 성경에서 열왕기상 17장 8-15절에 기록되어져 있는 사르밧 과부의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나타난 엘리야는 자신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뭄으로 먹을 것이 없었던 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의 아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사건의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엘리야 선지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신이 사는 동안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왕상 17:16).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남편을 잃은 여인이 두 렙돈의 헌금을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이 여인의 삶을 책임져 주셨다는 내용은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은 헌금을 드리는 성도의 올바른 자세로 설교를 하는 것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 신학자들도 이러한 내용을 깊이 연구하면서 1980년 이후로는 자신의 전 제산 두 렙돈을 드린 남편을 잃은 여인의 이야기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관련된 올바른 자세라고 강조하기보다,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통하여 어떻게 남편을 잃은 여인의 돈을 착취하였는지에 관한 비극적인 예로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의견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여인의 사건을 부분적으로 생각하기 보다 큰 그림으로 생각해 보면 마가복음 12장 38-44절의 말씀입니다.
남편을 잃은 가난한 여인의 모습에 초점을 두고 본문을 생각해 보면, 성전에서 서기관들의 잘못을 언급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하나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라는 내용입니다(막 12:40).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남편을 잃은 여인이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어집니다. 더 나아가서 동일한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의 원인으로서 성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눅 21: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AD 70년 로마 황제 티투스의 공격에 의해서 예수님의 예언(막 13:1-2)이 성취되었는데 그 원인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에 의해 성전을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미기 위해서 잘못된 헌금을 강조한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세기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13 종류의 헌금함이 있어서 각종 이름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과부와 고아의 물건을 약탈하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사 10:2)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러면 우리들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남편을 잃은 여인의 헌금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모습과 동시에 두 렙돈을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여인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막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막 12: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 12: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소유하고 있는 두 렙돈의 헌금이 여인의 전 재산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성도님들의 헌금을 강요하는 행동은 잘못입니다.
누가복음 21장 5절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에 들여지는 헌금을 통하여 성전을 꾸미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은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지막 생활비 전부까지 성전에 바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교회가 탐욕을 부리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어느 교회이든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을 하지만 탐욕으로 교회 건물을 자랑하려는 마음으로 바뀌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심판의 결과가 1세기에서는 성전 붕괴라고 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교회에서 성도님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5절의 말씀에서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책망하십니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두 렙돈의 헌금을 드리는 남편을 잃은 여인의 모습을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한 부정적인 예로 사용하고 계시다고 하면, 이와 반대로 교회는 사회적 약자에 해당이 되어지는 분들을 도와 드려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교회가 전할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소중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러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자와 가난한 자의 영혼의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을 믿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시편 51편 17절의 말씀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물은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합니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비록 남편을 잃은 여인은 잘못된 서기관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헌금을 드렸지만, 이 여인이 처해져 있는 상황 가운데에서 부자들이 넉넉함 가운데에서 드리는 헌금보다, 가난한 삶 가운데에서 전 재산을 드리는 헌금을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내용은 남편을 잃은 여인이 드린 헌금의 위대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탐욕의 마음을 책망하시는 내용으로 마가복음 12장에 기록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의 원칙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