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9일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5:35-43
제목: 믿음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요한 마가는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치료를 받는 사건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의 중앙에 배치하면서 야리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를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나눈 말씀을 짧게 정리해 보면,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구약의 율법(레 15:19-33)에 근거하여서 부정한 상태였고,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 여인과 접촉할 경우에 공동체를 부정한 상태로 만드는 상황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자락을 만지기만해도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는다는 믿음의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예수님의 옷 자락을 만졌습니다 (막 5:30).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확신과 신뢰는 기적을 만들어 냈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은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통하여 우리들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믿음은 기적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의 믿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시는 사건과 연결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어지는 35절의 말씀을 보면 너무나도 슬픈 소식이 들립니다.
(막 5: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전한 소식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으므로 예수님을 보내 드리라는 내용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시는 시간으로 인하여 야리로의 딸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지금 야이로의 딸과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 중에 누가 예수님의 손길이 더 급하게 필요합니까?
야이로의 딸입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치유해 주시고 나서 고쳐 주셔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는 시간에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역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요한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기적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포기했을 때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의 폭풍 가운데에서 죽게 되었을 때에 갈릴리 호수를 꾸짖으셨고(막 4:38-39),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때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고(막 5:1-20),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많은 의사의 노력에도 고칠 수 없을 때 고쳐 주셨습니다 (막 5:24-34).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야이로의 딸은 죽음을 맞이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소식을 들으시고,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막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두가지 명령으로 기록되어져 있는데, 두려움을 이기면 믿음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죽음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들으시고, 바로 가셨다고 하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지난 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가셨다는 것입니다. (요 11:14)
예수님의 베다니 방문은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믿음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하여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1:40절에서 마르다에게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가 살아난다는 사실을 믿는 자가 있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내가 믿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야이로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과 함께 도착했을 때에, 야이로의 집은 슬픔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12살 된 어린 딸(θυγάτριον)의 죽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향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 11:11)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야이로의 딸에게도 이야기 하십니다.
(막 5: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러자 사람들의 반응은 비웃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은 이성적인 판단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누가복음 8:53절에서,
(눅 8:53)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그러나 믿음이란 이성적인 판단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가 샌드위치 구조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사건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중앙에 있는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이유는 이 여인의 믿음 때문입니다.
유대 문화에서 숫자 12는 완전 숫자입니다. 그러면 한 여인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는데 의사에 의해 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 이 여인에게 있어서 혈루증에서 깨끗함을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확신과 신뢰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리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결국 기적은 믿음의 확신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죽은 야이로의 딸이 다시 살아나는 것도 믿음으로 가능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내보내시고, 아이의 부모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만 데리시고 야이로의 딸에게 가셨고, 아이의 손을 잡고 아람어로 “달리다굼”(ταλιθα κου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난 후에 소녀는 즉시(εὐθὺς) 일어나 걸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가는 메시아의 비밀로서 이 사건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합니다.
(막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그러나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지더라” (마 9: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마가는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고침을 받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하여 전파되는지 깨닫게 하십니다.
또한 믿음에 관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4:40절에서 풍랑 앞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 두가지 사건을 통하여 믿음이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확신하는 것이라 가르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불가능한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안에서는 가능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들의 삶에도 함께 있기를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