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9일 쉴만한 물가 교회 주일 설교
마가복음 10:35-45
참된 제자도: 대속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들은 구약 성경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과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을 고치는 일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 하십니까? 열왕기상 17장 17-24절의 말씀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사건과, 열왕기하 4장 18-37절의 말씀에서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사건을 통하여 죽은 자들을 살리는 사건은 선지자를 통하여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이 고침을 받는 사건은 구약 성경 어느 곳에서도 기록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시각 장애인과 청각 장애인이 고침을 받는 장면이 구약 성경에서 등장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열방을 회복 시키시는 모습(사 29:18; 35:5)이나, 메시아의 통치가 이루어졌을 때에 나타나는 현상(사 42:7, 18)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러한 메시아의 사역은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는 내용을 통하여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길 위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 8:21-10:52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메시아의 사역은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모습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습니다. 벳새다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8장 25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막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마가의 기록은 단지 시각 장애인이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의 여정을 통하여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는 사실을 밝히 보기를 원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서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언급하셨지만(막 8:31; 9:31; 10:33-34)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막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막 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말씀인 마가복음 10장 35-45절의 내용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잘못된 영광을 구하는 모습을 통하여 다른 10명의 제자들이 화를 냈을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는 목적을 가르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질문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막 10: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다시 질문을 하였을 때에(막 10:36),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구체적인 내용을 요구합니다.
(막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8:29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에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다볼 산에 올라가셔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 되셨을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막 9:7)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 가르쳐 주신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에 관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대속의 사역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막 10: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처음 듣고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은 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마가의 공동체는 “내가 마시는 잔”과 “내가 받는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1세기의 교회 공동체들은 매주 주일에 떡을 떼었는데(행 2:42,46; 20:7,11; 27:35) 떡을 떼다는 의미는 성찬에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찬에서 사용하고 있는 잔은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내가 받는 세례”는 어떠한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로마서 6장 3절에서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성도가 세례를 통하여 십자가 사건과 연합하였다는 것은 새 생명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삶인데, 이러한 삶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과 연합되었음을 의미합니다(롬 6:5).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삶에 관한 예언을 말씀하십니다.
(막 10: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사도행전 12장 1-2절의 말씀을 보면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서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장수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복음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본문 4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자신의 우편에 앉을 수 있는가 보다, 준비되어진 자가 앉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막 10: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러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준비된 자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과 연합한 자들 곧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과 예수님께서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들입니다.
본문 41절의 말씀을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기 곧 악한 눈에서 나오는 제자들의 화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내용이 것이 나머지 10명의 제자들에게 알려 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참된 섬김이 무엇인가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이 본문 42-45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2절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세상적인 권력 구조를 언급하시면서 43-44절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섬김의 구조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막 10: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막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가는 목적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걸어가는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고 난 후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참된 제자도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세번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의 예언을 통하여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하면서 권력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눈을 떠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본문 45절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길 위에서 마지막 가르침은 십자가의 사건의 의미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속물(λύτρον)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과 결과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목적과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삶의 여정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길 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주신 것처럼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속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함께 손잡고 천국에 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