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8:22-26 (27)
제목: 눈을 열어 예수님을 바라보자
마가복음 8장 22절에서 10장 52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벳세다에서 여리고까지 내려가시는 길 위에서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여정 가운데에서 처음과(막 8:22-26) 끝에(막 10:46-52)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고, 그 여정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예언하시는 모습이 반복해서 세 번(막 8:31; 9:31; 10:33-34)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A. 8:22-26 벳세다에서 시각 장애인을 고치심
B. 8:27-38 예수님의 첫번째 수난 예고
C. 9:30-50 예수님의 두번째 수난 예고
B´. 10:32-45 예수님의 세번째 수난 예고
A´. 10:46-52 여리고에서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를 고치심
마가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시는 길 위에서의 여정 가운데에서 이러한 수사학적인 구조를 사용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메시아의 비밀은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메시아의 비밀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여서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막 8:29)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본격적으로 드러내서 가르치십니다(8:31).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내용입니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이러한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제자도에 관한 중요한 가르침 이후에 두 번 더 반복되어집니다(막 9:31; 10:33-34)
이러한 수사학적인 구조에서 처음과 끝을 감싸고 있는 사건이 벳세다와 여리고에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으로 샌드위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여러 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이 처음 등장하는 본문이 8장 22-26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마가가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갈릴리의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여정의 처음과 끝에 배치를 했다고 하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가가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벳세다에서 여리고로 가는 여정의 처음과 끝에 배치하는 이유는 제자들이 영적인 무지에서 눈을 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바라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살펴보면 단지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기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 너머의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벳세다에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에서 기록하면서 시각 장애인의 “눈”(ὄμμα; ὀφθαλμός)이라는 단어를 두 번 언급하면서도, “보다”(ἀναβλέπω; βλέπω)라는 단어를 여섯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단계를 거쳐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셨는데, 처음에 이 시각 장애인이 보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질문하셨을 때에 시각 장애인은 어떻게 대답을 하였습니까?
(막 8: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예수님의 첫 번째 안수 후 시각 장애인은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은 나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통하여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비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귀신 들린 사람들에 의해서 선포 되었고(막 1:24, 3:11, 5:7),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적 행위로서 갈릴리 호수를 잔잔하게 하시고(막 4:35-41),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시고(막 6:45-52),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사건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시각 장애인이 첫번째 안수를 받았을 때에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모습이 나무와 같이 뿌옇게 보이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고 하지만 세상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믿음의 확신이 분명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막 8:29)라는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예언하셨을 때에 강하게 항변해서(ἐπιτιμάω) 예수님의 책망을 받은 자가 베드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의 눈에 다시 안수하셨을 때에 시각 장애인은 어떻게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까?
(막 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마가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세다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여정에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한 목적이 본문 25절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에서 시각 장애인이 “모든 것을 밝히 보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시면 병자가 모두 고침을 받고, 더 이상 배고프지 않고 사람들의 생각에서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예언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강하게 항변했고,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왕의 자리에 오르시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막 9:34).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영적인 눈을 뜨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닫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앞에서 제자들은 도망쳤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처럼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번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백부장의 신앙 고백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선포되어집니다.
(막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모습이 예수님께서 시각 장애인의 눈에 안수 하셨을 때 처음 보는 모습으로 막연하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원의 소망,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소망, 부활의 소망, 영원한 생명의 소망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바라보아야 천국에 시민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스데반이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논쟁가운데에서 공회에 잡혀 왔을 때에 대 제사장 앞에서 구약의 구속의 역사를 설명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하나님의 나라를 밝히 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마가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벳세다에서 여리고로 가시는 여정 가운데에서 시각 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목적은 시각 장애인이 눈을 떠 사물을 밝히 보는 것처럼, 제자들도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을 밝히 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