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9일 쉴만한 물가 교회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11:20-25
제목: 모든 민족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 공동체
요한 마가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록하면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죽는 사건을 샌드위치 구조라고 하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화과나무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구약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포도나무와 더불어 무화과나무는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 마가는 의도적으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서 말라 죽는 사건을 처음(막 11:12-14)과 끝(막 11:20-21)에 배치하고 있고, 그 중앙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사건(막 11:15-19)을 기록하면서 열매 없는 삶의 원인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 제도를 이용해서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레위인들을 책망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무화과나무와 비교해서 설명해보면, 유대 지도자들의 삶은 무화과나무가 유월절 쯤인 봄에 잎은 무성하지만 처음 익는 푸른 열매인 ‘파게’(page) (아 2:13)를 맺지 못한 삶을 의미합니다. ‘파게’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요한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무화과의 때에 열리는 ‘테에나’를 맺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바라보지 못하고, 잎만 무성해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헛된 모습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20-21절의 말씀을 보면, 샌드위치의 곁 빵의 끝에 해당이 되어지는 봄철에 파게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결말을 보게 됩니다.
(막 11: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막 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열 두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무화과나무의 모습은 뿌리째 말라 죽었습니다. 우리들은 유월절 쯤인 봄철에 파게의 열매를 맺지 못해서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의 사건을 단순히 무화과나무의 죽음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상징하고 있다면, 무화과나무의 죽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삶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의 말씀을 보면 세례 요한이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 3:8)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관련해서 3장 10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결과적으로 우리들의 신앙도 기독교의 모양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불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들의 삶 가운데에서 열매를 맺는 삶이란 어떠한 삶이고, 우리들은 어떠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는 삶은 죄로부터 해방될 때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롬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결과적으로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에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과 연합하여서 세상의 통치권에서 그리스도의 통치권으로 이동하여서 은혜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성도는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지고, 죄로부터 해방되어서 의의 종이 되어지고, 우리들의 생각과 몸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므로 삶 속에서 거룩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 거룩함의 열매로서 영생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요한 마가가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예수님의 메시지를 본문 22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11: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라”는 표현은 무화과 나무와 관련하여서 사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마가복음에서만 기록을 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에 이에 순종했던 성경 속 인물과 성경 구절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신약 성경에서도 로마서 4장 3절, 갈라디아서 3장 6절, 그리고 야고보서 2장 23절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고, 그 결과 의롭게 되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믿음의 기도, 그리고 죄 용서함의 기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 23-24절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본문 23-24절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믿는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aman)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확인하다, 지원하다”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의 의미는 “굳건히 하다, 확실히 하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실 약속을 말씀에 근거해서 현재의 상황 가운데에서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최대의 적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의심입니다. 의심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미래의 약속을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산이 바다에 던져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신뢰성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의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능력을 가로막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25절의 말씀에서 믿음의 기도에서 죄 용서함의 기도로 주제를 바꾸십니다.
(막 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우리들은 본문 25절의 내용을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말씀하고 계신 마태복음 5장 23-24절의 말씀을 통하여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강조하고 계신 내용은 서로 먼저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 마가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는 사건을 샌드위치 구조를 통하여 말씀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열매 없는 삶은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기도 하며 나아갈 때에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들은 하나님께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