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은 새벽 빛 마저 사라지게 합니다
이사야 21:1-4
쉴만한 물가 교회
김윤규 목사
우리 개역 개정 성경에서 21:1-10절의 표제를 보면 “바벨론 멸망에 관한 묵시”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부분에 동의하지만 20장 1-5절의 말씀이 유다를 향한 심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Penna; Kissane).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주전 539년에 있었던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바벨론 정복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근거로 본문 2절의 엘람과 메대가 페르시아인들과 연합하여서 바벨론을 공격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의 말씀을 읽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 21:1)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라 적병이 광야에서, 두려운 땅에서 네겝 회오리바람 같이 몰려왔도다
“해변 광야”가 어디인가는 상당히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변 광야를 바벨론으로 생각한다면 이 지역은 아마도 페르시아 만(Persian Gulf) 주변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은 자신들이 다른 나라들을 돕는 능력이 있어서 바다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광야에 불과하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평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적병이 네겝 회오리바람 같이 몰려온다고 개혁 개정에 번역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적병”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단지 무엇인가 온다고 언급하면서 비밀스럽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의 말씀에서는 선지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혹독한 묵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2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 21:2) 혹독한 묵시가 내게 보였도다 속이는 자는 속이고 약탈하는 자는 약탈하도다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의 모든 탄식을 내가 그치게 하였노라 하시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보고 있는 묵시가 너무나도 혹독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 선지자를 고통에 가득 차게 하는 묵시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바로 배반입니다.
우리들의 이사야 시대의 역사 가운데에서 앗수르가 자신을 의지하려고 했던 남 유다를 배신하는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바벨론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력에 따라서 움직이는 “엘람”과 “메데”는 권력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주전 700년경 자신들과 동맹국이었던 바벨론에 등을 돌려 페르시아와 동맹하는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벨론 땅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는 관계로 신뢰가 깨져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묵시로 바라보는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본 묵시를 전하는 고통을 3-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 21:3) 이러므로 나의 요통이 심하여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 같은 고통이 나를 엄습하였으므로 내가 괴로워서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4) 내 마음이 어지럽고 두려움이 나를 놀라게 하며 희망의 서광이 변하여 내게 떨림이 되도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본 묵시를 전하는 것이 혹독하다고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고통이 3절에서는 해산의 고통과 같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본 묵시로 인하여 귀가 멀고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4절에서는 새벽 빛(서광)은 도리어 이사야 선지자를 무서워 떨게 만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보는 묵시 가운데에서 새벽 빛 가운데에서도 떨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남 유다가 앗수르의 압박 가운데에서도 애굽이나 바벨론을 의지하려고 했지만 애굽과 바벨론의 멸망은 남 유다의 백성들이 생각하는 새벽 빛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배반의 역사와 힘의 원리가 이사야 시대의 국가들을 움직이고 있었고 이러한 배반은 새벽 빛 마저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오직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의지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늘 하루도 살아가시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