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이사야 7:10-17
쉴만한 물가 교회
김윤규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하스 왕의 믿음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제안을 하시는 내용으로 시작이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제안하신 내용이 본문 11절에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사 7: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본문 11절의 말씀을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스올(שְׁאוֹל)이라는 단어와 천상(מַ֫עַל)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개역 개정 성경에서는 직접적인 번역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 의미를 살려서 11절 말씀을 번역을 해보면,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높은 곳 천상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구하라”
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제안은 아하스의 믿음이 향상되어질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만일 아하스가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 드리고 징조를 구했다고 하면 남 유다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아하스는 믿음의 길로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께서 제안 하신 내용을 받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아스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사 7: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아하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처럼(민 14:22) 하지 않겠다는 겸손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반역 행위는 다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아하스 왕의 겸손한 표현처럼 들리는 12절의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본문 13절의 말씀입니다.
(사 7:13)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본문에서 “괴롭히다”는 의미는 “지치게 한다”(לָאָה)는 의미입니다. 결과적으로 아하스의 행동은 백성들과 하나님을 지치게 하는 행동이고 믿음이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면 아하스가 원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들은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남 유다를 공격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하 16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16:7절의 말씀을 보면 아하스는 이미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열방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왕하 16:7)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결과적으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다메섹을 쳐서 아람 왕 르신을 죽였습니다. (왕하 16:9)
이러한 배경 가운데에서 임마누엘의 징조가 본문 14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들은 본문 14절의 말씀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사야 당시의 상황에서 적용되어진 본문의 의미이고, 두 번째는 마태에 의해 적용 되어진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이사야서를 읽고 있기에 이사야 안에서 이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 14절에 기록이 되어진 처녀라는 히브리어 명사는 “여성”(נְקֵבָה / אִשָּׁה)을 지칭하는 전형적인 단어가 아니라, 젊은 여성을 지칭하는 “알마흐”(עַלְמָה)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70경에서는 “처녀”(παρθένος)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사야서 안에서 14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잉태된 한 아이가 “선을 택할 줄 알 때” 곧 율법을 깨달아 알을 수 있는 12살이 되기 전에 다윗 가문을 위협했던 북 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의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사 7: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결과적으로 이러한 해석은 북이스라엘의 멸망 12년 전인 주전 734년의 예언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되어지고 적용 된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임마누엘의 징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는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하스 왕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생각으로 모든 길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한 삶입니다.
결국, 언약의 하나님께서 언약의 백성들에게 약속해 주시고, 공급해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약속을 믿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는 귀하고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