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일 쉴만한 물가 교회 종려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11:1-10 (p. 73)
제목: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
요한 마가는 예수님께서 벳세다에서 출발하여서 여리고에 도착하는 길 위에서의 여정(8:22-10:52) 가운데에서 참된 제자도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참된 제자도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 위에서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세 번(막 8:31; 9:31; 10:33-34)이나 강조하고 계신데 이 수난 예고를 통하여 제자들이 눈을 떠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바라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막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막 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면 제자들과 군중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에 있습니다. 제자들과 군중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예수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예루살렘의 입성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주변 벳바게와 베다니라고 하는 무화과 동네에 도착하셨을 때에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맞은편 마을에 가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왜 나귀 새끼를 풀어 갑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주가 쓰시겠다”라고 대답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막 11: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막 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그러면 여러분들은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나귀와 어떠한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겸손의 왕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 나귀와 겸손, 그리고 메시아의 이미지는 어떻게 연결해 볼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처럼 고대 근동 사회에서 나귀는 사람들의 운송 수단이거나(민 22:21), 짐을 나르는 수단이거나(창 42:26), 농사에서 쟁기를 가는 수단(사 30:24) 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들은 구약 성경에서 나귀의 특별한 이미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민수기 22장에 기록되어져 있는 발람의 나귀 사건일 것입니다. 모압 왕 십보라의 아들 발락이 발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줄 것을 요청하였을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발람이 타고 있는 나귀의 길을 막아섰습니다(민 22:23). 그 때에 발람은 나귀를 세번이나 채찍질 했는데,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귀의 입을 열어서 발람과 나귀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일 것입니다(민 22:21-35).
이 장면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귀가 말을 했다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귀를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나올 왕(창 17:6)의 모습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솔로몬이 왕이 되기 위해서 기름 부음을 받으러 에덴 동산의 두 번째 강인 기혼 샘으로 갈 때에 솔로몬은 다윗의 노새를 타고 갑니다(왕상 1:33,38,44).
(왕상 1:43)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과연 우리 주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으로 삼으셨나이다 (왕상 1:44) 왕께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솔로몬과 함께 보내셨는데 그들 무리가 왕의 노새에 솔로몬을 태워다가 (왕상 1:45)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무리가 그 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읍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상기시키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를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9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은 다윗의 후손에서 나게 될 왕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회복시키는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특징 가운데에서 첫째, “공의로우시며”, 둘째, “구원을 베푸시며”; 셋째,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는” 세가지 모습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세번째 특징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어린 나귀가 이미지로 가지고 있는 평화의 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스가랴 선지자가 언급하고 있는 “공의”와 “구원”은 어떠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 되어집니까?
우리들은 예레미야 23장 5절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보면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 곧 메시아가 나와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렘 23: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실 때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구원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깨닫고 있다면(마 1:21), 우리가 스가랴서 9장 9절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겸손을 상징하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한다는 사실은 스가랴 9장 10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의 결과로서 화평 곧 샬롬을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그러므로 스가랴 선지자가 메시아의 사역으로서 더 이상 국가 간의 전쟁이 없는 화평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인하여 막힌 담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움에 참여하여서 구원 받고 하나님과 화평(שָׁלוֹם)의 관계를 이루게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매년 종려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 해 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깊이 있게 묵상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이루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들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의로움에 참여하는 고난 주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