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3일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3:20-30 (신약 57-58)
제목: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막 3: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우리들은 마가복음 2:18-3:6절에 기록되어져 있는 금식 논쟁(막 2:18-22)과 안식일 논쟁(막 2:23-3:6)을 통하여 형식과 본질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의 형식에 매여서 본질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들은 신앙의 본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통하여 원하시는 것은 회복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논쟁 이후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막 3:10), 더러운 귀신들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막 3:11)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세우시고(막 3:13-19), 오늘 본문 말씀 예수님과 바알세불의 논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귀신을 내 쫓는 사건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마 12:22; 눅 11:14)을 배경으로 예수님과 바알세불과의 논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12: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그러나 마가는 예수님의 가족들의 표현으로 예수님이 정상적인 이성의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본문 2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마가복음 3: 22절에서부터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막 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먼저 우리들은 바알세불(Beelzebul)에 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적 배경에서 바알 세불은 바알 세붑(בַּעַל זְבוּב)이라고 불리는 ‘파리 떼의 왕’ 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파리 떼의 왕’을 섬긴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파리를 귀한 곤충이라고 생각하고 섬겼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한 애굽 땅을 향한 10가지 재앙 가운데에서 네 번째 재앙이 파리 떼의 재앙이었는데, 이것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파리 떼를 그들에게 보내에서 그들의 마음이 잘못된 우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바알세붑은 블레셋 땅 에그론 지역의 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 우상의 특징은 병을 고치는 특징(왕하 1:2)으로 자리 잡혔습니다.
[(왕하 1: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의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그리고 신약 시대에서 ‘귀신의 왕’ (마 9:34)이라는 표현이 ‘바알 세불’ (Βεελζεβούλ)로 지목되었는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시대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에 의한 ‘하늘의 주’로 우상 숭배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약과 중간기 시대의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바알세불’을 ‘사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막 3: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그리고 24절과 25절에서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첫 번째 비유의 대상은 나라이고 두 번째 비유의 대상은 집입니다.
(막 3: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막 3: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그리고 이러한 비유의 핵심은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나라와 집이 분쟁이 일어나면 그 나라와 집은 더 이상 굳게 세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5:20절에서 육체의 일을 언급하면서 분쟁의 결과로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이단을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언급하고 있는 한 집단 안에서 내적 분열(internal strife)은 상대를 향한 힘을 발휘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하고 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결론이 본문 3장 26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막 3: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시는 능력은 바알세불이라 불리는 사탄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기관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본문 27절에서 또 다른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이 비유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만일 어떠한 사람이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서 물건들을 약탈한다고(διαρπάζω) 하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한 후에 가능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를 예수님과 사탄의 관계로 예수님의 비유를 설명해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 = 예수님
강한 자 = 사탄
집 = 사탄의 결박 안에 있는 세계의 구성원
세간을 강탈 =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
그러므로 본문 27절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은 사탄의 능력을 뛰어 넘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마가복음 1:24절과 3:11절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의 입술을 통하여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내용을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 3:28-29)
(막 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막 3: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 ‘진실로’라는 단어를 처음 기록하고 있는데, 사복음서에서 ‘진실로’라고 기록되어져 있는 헬라어가 아멘(ἀμήν; אָמֵן)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강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후에 ‘아멘’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강한 확인에 의한 믿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진실로’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는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한 원칙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원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본문 28-29절의 말씀을 다시 보면,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들의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습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 성령을 모독(비방)하는 죄란 어떠한 배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기초해서 보면, 예수님의 대적자들인 서기관들의 마음이 완악해 져서(막 3:5), 성령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으로 설명이 되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의 사역과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태복음 12:28절에서,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정의해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고침을 받은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성령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완악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완악한 마음’ 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기초해서 제가 공부했던 미국 칼빈 신학교에서 성경 신학을 기초해서 조직 신학을 가르쳤던 안토니 후크마(Anthony Andrew Hoekema)교수는 성령 모독 죄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우리가 귀 담아 들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알려진 진리를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행동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와 성령의 사역과 구원의 진리를 알면서도 배척하는 행동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행동입니다.
넷째, 그러므로 이 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기도를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행동입니다.
다섯째,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었는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완악한 마음으로 인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성령 모독 죄에 관한 명확한 정의를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행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