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8일 쉴만한 물가 교회 주일 설교
마가복음 10:1-12
참된 제자도: 이혼에 관하여
우리들은 대림절과 성탄절 그리고 신년 예배를 드리고 마가복음 강해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가복음 9장 38-50절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의 소중함(9:38-42)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9:43-50).
특별히 우리가 주목한 것은 “실족하게 한다”는 헬라어 동사(σκανδαλίζω)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지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예수님을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한명이라도 믿음과 관련되어서 걸려 넘어지게 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자신의 삶 속에서도 죄에 걸려 넘어진다고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12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길 위에서 결혼과 이혼에 관한 내용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사인 저에게 결혼에 관한 주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설교할 수 있지만, 이혼에 관하여 설교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지난 4주 동안에 대림절과 성탄절 그리고 신년 예배의 시간을 보내면서 개인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이혼에 관하여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먼저 본문에 기록된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이혼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떠나서 유대 지방으로 가서 요단강을 건너가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예수님께서는 전과 같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적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질문하는 내용이 본문의 배경이 되어집니다. 바리새인들이 던진 질문은 예수님을 통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께 올무(trap/snare)를 놓아서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대화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막 10: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막 10: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막 10: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모세는 어떻게 언급하고 있는지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24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모세의 가르침에 관한 신학적인 답변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을 올무(trap/snare)로 붙잡기 위한 용도로 답변을 합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모세는 신명기 24장 1-4절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의 율법을 제시하는데, 그 내용은 한 여인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였을 때에 재혼을 하고 다시 홀로 되면 전 남편에게 돌아 갈 수 없다는 율법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목적은 언급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방법으로 이혼 증서를 써 주라는 내용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조금 구체적으로 읽어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율법은 이혼 증서를 작성해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 남자와 여자에게 사형을 집행하여서 악을 제거하라고 신명기 22장 22절의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의 답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막 10: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모세가 이혼 증서를 작성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완악한 마음입니다.
마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완악한 마음을 3장 5절과 6장 5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3장에서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는 모습 가운데에서 바리새인들의 완악한 마음을 지적하고 계시고, 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셨을 때에 제자들이 심히 놀라는 모습을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제자들이 마음이 완악해 져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고 계신 “완악한 마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행동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결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막 10: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막 10: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막 10: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막 10: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이혼에 대한 대답보다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관계로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서 결혼을 하였을 때에 결혼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충실히 깨닫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고 권면하십니다.
마가복음 10장 10-12절의 말씀에서는 사적인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다시 한번 제자들을 향한 특별한 가르침이 시작됩니다.
(막 10: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막 10: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막 10: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그리고 우리들은 마태복음 5장 32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을 금하는 내용을 적용해서 본문을 해석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음행을 제외하고 이혼에 관하여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혼의 이유를 생각해 보면, 부부간의 불화, 경제문제, 가족 간의 불화, 건강문제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성격 차이가 이혼의 가장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 가정에 가정 폭력이 있다고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무엇이 본질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혼에 관하여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몰라 존경하는 목사님께 상의 드렸을 때에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예화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젊은 여자 집사님이 이혼에 관하여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여자 집사님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담을 하는 목사님이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음행의 문제가 아니면 참고 살아가시라고 권면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집사님은 더 이상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녀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만일 목사님께서 이 여자 집사님에게 이혼을 권면해 드렸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것일까요? 생명보다 결혼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소중합니까? 우리들은 이러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간음을 제외한 이혼의 사유를 인정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남편을 사별한 경우에도 여인의 신분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한 여인이 음행의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이혼을 했다고 하면 이 여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혼의 사유는 한 여인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인권 보호가 바탕에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결혼이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면 결혼의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위험입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이혼에 관한 가르침을 살펴보면 성경은 이혼을 장려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결혼의 본질적인 목적이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결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교회와 사회가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운 가정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더 이상의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혼을 선택 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 계시다고 하면 교회는 그들을 품고 상처를 싸매 주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남편은 아내의 삶과 신앙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바르게 살게 되고, 아내는 남편의 삶과 신앙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바르게 살게 되고, 자녀들은 부모님의 삶과 신앙을 보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바르게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