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쉴만한 물가 교회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11:12-14 (p. 73)
제목: 영적 부흥은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 있는 무화과 나무가 저주를 받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라 죽은 사건도 우리들에게 큰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우리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는 시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사실과(막 11:12-14),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신 후에(막 11:15-19) 다시 무화과 나무를 보았을 때에 나무가 말라버렸다는 사실 때문입니다(막 11:20-21).
우리들은 요한 마가가 샌드위치 구조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무화과 나무가 저주를 받아서 말라 죽는 사건은 성전을 깨끗이 하는 사건을 감싸고 있는 빵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길 위에서(on the way)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막 10:45)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다는 사실과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막 8:31; 9:31; 10:33-34)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 눈을 떠서 분명히 보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영적인 눈을 떠서 바라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막 11:1-10), 베다니에서 떠나가실 때에 시장하셨고, 한 무화과 나무를 바라보게 되셨습니다.
(막 11: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상징적인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40일을 금식 기도하신(마 4:2)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시장하시다는 이유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시다는 것이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시다는 표현이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배가 고프셔서 좋은 열매를 찾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영적 열매를 찾고 계신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바로 무화과나무(fig tree)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화과나무의 상징적인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서 치마를 만들을 때에 무화과 잎을 사용하는 모습입니다(창 3: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비옥한 가나안 땅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 바로 이스라엘의 7가지 대표적인 열매 중에 하나가 무화과 열매입니다.
(신 8: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 관계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왕상 4: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상징으로 표현되어지는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에서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요한 마가의 표현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동이 비 이성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고 계신 시기와 요한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시기를 정확히 구분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고 있는 시간은 유월절에 가까운 시간으로 이른 봄에 해당이 됩니다(요 2:3). 봄이 되면 무화과나무에서 익지 않은 작은 열매(unripe figs)가 맺히는데 이것을 ‘파게’(θφαγή)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단어를 지명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Βηθφαγὴ)와 베다니(Βηθανίαν)에 이르렀다고 11장 1절에서 말씀하고 계신데, 바로 ‘벳바게’가 ‘익지 않은 무화과나무의 집’ 이라는 의미입니다.
(막 1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그러나 요한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의미에서 무화과의 때는 무화과가 완성된 열매를 맺는 9-10월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매를 ‘테에나’(תְּאֵנָה)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서 찾는 열매는 새순이 나오고 잎사귀가 자란 후에 맺히는 작은 열매 ‘파게’이고, 요한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무화과의 때”는 완성된 열매로서 ‘태에나’입니다.
이렇게 구분을 해보면,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 무화과나무에서 익지 않은 작은 열매로서 ‘파게’를 찾고 계셨는데 이 무화과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하지 열매를 맺으려는 작은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막 11: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저주하신 장소가 어디입니까? 바로 ‘베다니’입니다. 베다니 지명이 히브리어에서 형성된 모양을 보면 집을 나타내는 ‘베이트’와 무화과 열매를 나타내는 ‘테에나’가 결합이 되어서 ‘무화과의 집’이라는 의미의 ‘베다니’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무화과 열매의 주 생산지인 베다니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비록 자신들이 언약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외치면서 세례 요한이 요구하고 있는 삶이 무엇입니까?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마 3:8).
그런데 유대인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한 작은 ‘파게’가 없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봄철에 새순이 나오고 잎사귀가 자란 후에 맺히는 작은 열매 ‘파게’가 성장하여서 가을에 무화과 열매 ‘테에나’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들의 신앙에 적용해 보면, 신앙의 열매, 영적 부흥의 열매, 기도의 열매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지난 2월 8일 미국의 캔터키 주의 작은 도시 윌모어(Willmore)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애즈베리 대학교(Asbury University) 수요 채플에서 시작된 애즈베리 부흥(Asbury revival)에 관하여 듣고 있습니다. 애즈베리 부흥 운동은 한 청년의 회개에서 시작되었지만, 애즈베리 부흥 운동은 성령의 부흥의 역사를 갈망하고 있었던 분들의 기도가 쌓일 때 애즈베리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1907년 2월 15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되어진 부흥의 운동을 생각해 보아도 당시 길선주 장로님이 세상을 떠난 친구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00달러에 해당하는 거금을 착복했다는 회개의 고백을 하면서 자신을 여호수아 7장에서 아이 성 전투의 패배를 이끌었던 아간으로 비유하였을 때에 온 회중의 회개의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길선주 장로님의 회개의 운동은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을 이끌었고, 길선주 장로님은 1907년 가을에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영적 부흥을 위해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져 있는 오순절 성령의 부흥의 운동도 기도의 준비과정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영적인 부흥도 회개하고 기도하는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