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30일 쉴만한 물가 교회 주일 예배
마가복음 13:9-11
두려워 하지 말라
종말이라고 하는 단어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종말론(終末論)이라는 단어의 영어 표현은 ‘eschatology’라고 하는데, 이 단어가 형성되어진 헬라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마지막’이나 ‘끝’을 의미하는 ‘에스카토스’(ἔσχατος)라는 단어와 ‘교리’나 ‘가르침’을 의미하는 ‘로기아’(λογία)라는 단어가 합성되어져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세상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일들에 관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종말론에 관하여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종말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표현으로 ‘실현된 종말론’을 언급할 수 있고, 세상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서 ‘미래적 종말론’에 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믿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믿고 나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이미 시작되어진 하나님의 나라 가운데에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완전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의 확신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 땅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은 “언제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집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막 13:28-37)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를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막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깨어 있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붕괴를 예언하고 계실 때에 제자들의 관심은 이러한 일이 일어날 시간과 징조에 집중되어져 있었습니다(막 13:4).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진 실현된 종말론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은 종말의 시간과 징조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첫번째 원칙으로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말라”는 내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미혹에 넘어가서 다른 복음에 미혹되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제시해 복음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두번째 원칙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들은 두려움의 원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지 못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구원의 확신이 희미해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의 사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종말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세번째 원칙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막 13: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박해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공회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를 맞고 있는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상황에 놓여 있고 제자들이 권력자들에게 미혹되지 않거나, 하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과 구원의 확신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절의 말씀은 자연스럽게 11절의 말씀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막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그러면 11절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박해를 받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에 그들의 신앙이 미혹되지 않거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구원의 확신 가운데에서 서 있다고 하면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말씀해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들은 복음을 전하는 지혜를 주시는 성령의 역할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1세기의 정황 가운데에서 생각해보면 비록 교육을 받지 못한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나아가는 자들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공회 앞에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증인의 삶을 살아갈 때에 성령께서 함께해 주시면서 지혜를 주신다고 하면 성령께서 어려움을 이겨낼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본문 10절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까?
(막 13: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단어는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범위로서 ‘만국’입니다.
개역 개정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만국’이란 ‘모든 민족들’(πάντα τὰ ἔθνη)에게 전파되어지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급하고 계신 복음이란 세례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메시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하심,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나아갈 때에 초대 교회의 제자들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제자들의 삶을 통하여 핍박 가운데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에 일곱 집사 가운데에서 한명인 스데반을 생각해 보십시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성령으로 말할 때에 사람들은 대적하지 못하였고, 대제사장 앞에서도 복음을 온전히 전하였을 때에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사울(유대식 이름)이라고 불리는 바울(헬라식 이름)도 스데반의 죽음에 증인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이라고 불리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자신이 박해했던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은 어떠한 박해 가운데에서도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말씀하신 마지막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과 동행하여서 증인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들이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로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들은 복음의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