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사순절(Lent)을 보내면서 사복음서를 많이 읽게 되는데,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에 잎사귀가 있는 한 무화과나무(fig tree)를 저주하시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막 11:12-14).
요한 마가는 샌드위치 구조라고하는 독특한 방법으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데, 샌드위치의 빵에 해당하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서 말라 죽는 사건을 처음(막 11:12-14)과 끝(막 11:20-21)에 배치하고 있고, 그 중앙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사건(막 11:15-19)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궁금증으로 다가오는 내용은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으며, 무화과나무의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처음 무화과나무가 등장하는 장면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드는 장면입니다(창 3:7). 무화과 열매는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열매 맺는 삶과 열매 없는 삶을 상징하기도 합니다(렘 24:2; 눅 13:6-9).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사건과 연결하여서, 무화과 열매가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지도자들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는 잎사귀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혹시, 예수님께서 배가 고프신 이유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 사십일을 금식 하셨는데(마 4:2), 잠시 배가 고프시다는 이유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요한 마가는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 11:13)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찾고 계신 시절은 언제입니까? 바로 유월절 전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유월절이 있는 봄에서 초막절이 있는 가을까지 다섯 번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찾고 계신 유월절 기간에 맺는 무화과의 푸른 열매를 ‘파게’(page) (아 2:13)라고 부릅니다. 이와 다르게 요한 마가가 언급하고 있는 무화과의 때에 맺는 열매는 ‘테에나’(teana) (잠 27:18)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잎사귀는 자랐지만 처음 맺는 푸른 열매 ‘파게’를 맺지 못했습니다. ‘파게’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테에나’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신앙 생활의 열매를 맺기 위해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회개의 기도 운동 없이 단번에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싶은 욕심들이 있지 않습니까?
영적 부흥을 위한 회개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기도의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부흥 운동도 기도의 준비 과정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회개의 기도를 통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