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3일 주일 설교 (RWGC)
본문: 마가복음 2:13-17 (신약 55-56)
제목: 예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삶을 살아가면서 목적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성도의 삶 가운데에서 방향과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향성과 정체성은 성도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읽어 가면서 예수님의 초기 사역을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장에서
1) 제자들을 부르시는 사역 (막 1:16-20)
2) 더러운 귀신을 포함한 병자들을 고치시는 사역 (막 1:21-34; 40-45)
3) 전도 사역 (막 1:35-39)
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2장에서 가버나움의 집에 거하실 때에 네 명의 친구들에 의해 예수님을 만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의 기독론을 강조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일어나 내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가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져 있는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사건은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던 사건과 연결되어져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불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레위를 불러 보여 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난 후에 갈릴리 해변으로 나가 천국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십니다.
여러분들은 레위와 마태를 어떻게 연결시키고 계십니까? 이 두 가지 이름은 동일한 인물에게 주어진 이름입니까? 아니면 각각 다른 이름입니까? 네 맞습니다. 동일한 인물에게 주어진 이름입니다.
공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사건을 보면, 마가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명시하고 있고(막 2:14), 누가는 ‘레위라 하는 세리’(눅 5:27)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레위’라는 이름 대신에 ‘마태’라는 이름을(마 9:9)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의 지배 아래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유대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의 두 개의 이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위는 유대식 이름이고, 마태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당시 갈릴리 지역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는 일이 세관의 일입니다. 그리고 로마는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지원자 가운데에서 선별하여서 세리의 직분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세리라고 하는 직업은 로마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부당한 금액을 자신의 민족에게 매겨서 경제적 착취를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창녀들과 함께 회당에 출입하는 것조차 금지되어져 있는 죄인들로 분류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4절 말씀을 보면, 갈릴리 해변에서 가까운 곳에 세관의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 있었고, 그곳에 레위가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 다 함께 1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다는 동사 “κάθημαι”는 주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레위가 세관의 업무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었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레위를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레위는 즉시 반응하여서 “일어나 따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나타냅니다.
마가복음 1장 16-18절의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상징성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의 상징성은 (1)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에 주목하여서 (2)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세리를 열 두 제자 중 한 명으로 부르시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난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리 레위의 집에 들어가서 식사 교제를 나누었습니다(15).
(막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난 후에 함께 식사 교제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 때에 레위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과 레위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알 수 있는 정확한 사실은 이 잔치는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서 직접 베푼 잔치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다 함께 말씀으로 확인하겠습니다.
(눅 5: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그리고 우리들은 이와 유사한 내용을 누가복음 19장 1-10절의 말씀 세리장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우리들은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삭개오의 삶은 완전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눅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1)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2)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삭개오의 삶은 완전히 변화 받는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서 세리 레위의 삶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바리새인파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행동에 비판을 하였습니다.
(막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왜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비판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본문 17절의 말씀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장 38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전도입니다.
(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그러면 마가복음 1장 38절의 내용을 2장 17절의 말씀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고 계신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는 표현은 헬라와 유대 문학의 공통적인 격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격언은 의과 죄인이라는 대조을 만들어 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1)죄인들에게 죄 용서함을 주시고, (2)하나님의 나라에 죄인들을 초청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에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회개하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내용입니다. (막 1:15)
그리고 이러한 회개의 메시지는 순종과 불순종의 메시지와 연결이 되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 28-31절의 두 아들과 포도원의 비유를 통하여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번역 한국어와 영어/헬라어 순서 다름]
포도원 주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였고, 아들은 순종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에 가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둘째 아들에게도 동일하게 말하였는데, 둘째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그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서 누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까?
(마 21: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맏아들과 둘째 아들 중에서 누가 회개한 자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는 사건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죄인에게 전도하는 모습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회개 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레위는 물질의 풍요를 위해서 자신의 민족으로부터 세금을 착취하는 삶을 살아갔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 이후에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강단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선포하셨습니다.
죄인이었던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깨닫고 부름을 받아 한 교회에 모였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