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3일 주일 설교 (RWGC)
본문: 마가복음 2:18-22 (신약 56)
제목: 참으로 금식할 때는 언제 입니까?
교회 생활이 형식화될 때 본질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신앙 생활을 하면서 교회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 있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예배, 기도, 세례, 성찬,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금식 등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들은 그 안에 본질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형식은 본질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예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예배의 순서 안에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그 형식은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 하는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 순서에서 행하여 지는 모든 행동들은 형식이라고 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그 형식보다 소중한 것은 본질입니다.
그러면 예배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원에 감사, 찬송,고백, 회개, 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는 설교 등이 하나의 형태를 갖추어질 때에 우리들은 본질에 충실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2장 18-22절의 말씀도 금식의 본질과 형식의 문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요한의 제자들: 마태;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서기관: 누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막 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공관 복음서에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라서 금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대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인 이스라엘 달력 일곱째 달(티쉬리) (9월-10월 초) 십 일에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 속죄일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레위기 16장 29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라고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괴롭게 하다”는 문구가 이사야서 58장 3, 5절 말씀을 보면 금식과 연결이 되어집니다.
(사 58: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그러면 우리들은 대 속죄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면 금식의 본질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대 속죄일은 하나님의 거룩과 자비, 이스라엘의 선택과 용서의 필요성, 그리고 정결과 속죄를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날입니다.
특별히 대 속죄일의 최대 행사는 제비로 뽑은 염소 두 마리에 행하여 지는 일인데,
첫 번째로 뽑은 염소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물로 드리고(레 16:8,9),
두 번째로 뽑은 염소는 회막문 여호와 앞에서 취하여 아사셀(Azazel)을 위하여 드리는 행사입니다 (레 16:8, 10)
그러면 우리는 아사셀에 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레 16: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고,
레위기 16장 21-22절의 말씀을 보면 회막과 제단을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광야로 보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 16:21)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22)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속죄 염소를 광야에 보내는 이 의식은 백성들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하여서 그 죄를 부정한 장소인 광야로 추방하는 의식입니다.
그리고 이 날을 기념하여서 금식을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의 본질은 대 속죄일에 자신의 죄가 용서함을 받은 것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금식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왜 금식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본질의 내용은 없고 금식을 하지 않았다는 형식의 문제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 2: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대 속죄일의 전통으로 지키고 있던 금식을 금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지금 혼인 잔치가 베풀어져 있고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고 금식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복음을 외치고 계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막 1:24)로서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막 2:5)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는 사실(막 2:17)을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시는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정결 의식을 어기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막 2:15)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혼인 잔치에서 신랑은 누구이고, 혼인 집의 손님은 누구를 지칭하고 있습니까?
본문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혼식에 함께 있는 손님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금식해야 합니까?
(막 2: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우리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의 죽음의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마가복음 3장 6절에서 처음으로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막 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러면 우리들은 대 속죄일에 지키는 금식의 본질에 관하여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언제 금식해야 하는지 언급하는 말씀을 통하여 금식의 본질이 예수님의 죽음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알게 되어집니다.
구약의 금식의 본질은 대 속죄일에 자신의 죄 사함과 연결이 되어지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대체되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기면서 속죄의 사역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고,
또한 히브리서 9장 15절에서,
(히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대 속죄일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 비유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막 2: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이 두 가지 격언을 통하여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본문 21절의 낡은(παλαιός) 옷은 유대교의 전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베 조각(ἄγναφος)은 예수님의 복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낡은(παλαιός) 옷인 유대교의 전통에 연결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발효가 되지 않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않는 것은 새 포도주가 발효가 되면서 낡은 부대가 그 부피를 감당하지 못하고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비유는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로 표현되어지는 유대교 전통에서 금식이 그 본질적인 의미를 벗어나서 형식화되어져 있는 상황 가운데에서, 새 천조각과 새 포도주로 상징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 안에서 주어진 체계를 완성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서 새로운 구속 사역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전통에서 대 속죄일의 금식이 형식화되어서 그 의미가 쇠퇴해 갔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새로운 시대에 금식의 의미가 어떻게 적용이 되어져야 하는지를 우리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금식의 논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는 사실을 금식이라고 하는 상징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