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30일 쉴만한 물가 교회 주일 예배
마가복음 12:13-17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요한 마가는 포도원의 농부 비유(12:1-12)를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정체성 곧 기독론을 밝히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시편 118편 22-2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건축자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음을 강조하십니다. 모퉁이돌이란 가장 먼저 놓인 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모퉁이 머릿돌이 되신 것은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릿돌이 되어서 복음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포도원의 비유가 끝이 난 후에 요한 마가는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세가지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의 세금과 관련된 질문 (12:13-17)
-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질문 (12:18-27)
- 서기관 중 한 명이 예수님께 나아와 율법에 관한 질문 (12:28-31)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께 온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아서 올가미를 씌우려는 목적으로 다가와서 세금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막 12: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책잡다’라고 번역을 하고 있는 헬라어 동사 ‘ἀγρεύω’는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마가복음 12장 13절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성경 이외의 다른 문헌들에 사용 된 의미를 생각해 보면, “느닷없이 붙잡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비유적으로 사용이 되어서 “허를 찌르다”는 의미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사람들을 보낸 이유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잘못을 찾아 내서 예수님을 공격하고 죽이려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예루살렘 성 안에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이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이 하시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상황입니다(막 11:17).
그러면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이 질문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막 12: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A)당신은 참되시고 (B)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B´)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A´)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먼저 우리들은 14절 상반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 사람들이 질문하는 내용은 수사학적인 방법에서 교차 대구법(Chiasmus)을 사용해서 아첨의 말로 예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 가를 정확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A) 예수님은 참되시다.
(B) 예수님은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다(아무에게도 매이지 않는 분).
(B´)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사람을 편애하지 않으신다).
(A´) 예수님은 하나님의 길(도)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비록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 사람들이 예수님의 잘못을 찾아내서 공격하려는 목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들이 언급하고 있는 예수님과 관련된 내용은 정확합니다.
예수님께서 참되신 성품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길을 올바르게 가르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성품 곧 사람을 편애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잘못 가르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의 질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이 질문은 딜레마(dilemma)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옳다”고 대답을 하시면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경멸하는 수많은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등을 돌려서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얻게 될 것이고, 만일 예수님께서 “옳지 않다”고 말씀을 하시면 이것은 로마에 관한 저항이므로 로마의 법에 의해서 엄벌을 받게 된 상황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을 올무를 만들어 놓고 “옳다, 옳지 않다”는 대답만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놓은 올무에 빠지지 않으시고, 그들의 외식함을 언급하십니다.
(막 12: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외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외식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겉만 보기 좋게 꾸며 드러내는 모습을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ὑπόκρισις”라는 단어의 의미는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래적인 목적과 동기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 내는 공적인 모습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외식의 모습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면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당시 노동자 하루의 품삯인 한 데나리온에는 “티베리우스 황제 아우구스투스, 신이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전의 다른 면에는 “대 제사장”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데나리온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본문 16-17절의 말씀입니다.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막 12: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가이사’의 의미는 로마 황제의 칭호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대답은 예수님께서 로마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대답이 여기에서 끝이 났다고 하면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로마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주민세를 내면서 불만을 품고 있었던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배신자로 취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여기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로 이어지고 있고, 방점은 로마의 황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이 의미를 고신 대학교 석좌 교수로 계신 손봉호 교수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데나리온에는 황제의 형상이 있지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 그러므로 돈은 황제의 것일지 모르지만 황제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이다.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고, 따라서 데나리온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냐 정치권력이냐의 대비는 없어지고 하나님이 전체요 정치권력은 그 전체의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된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 사람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서 하나님보다 덜 중요한 세금에 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삶에서 더 중요한 문제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생각해 보면,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백성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영적 예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이러한 모습은 국가의 의무를 다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의무를 다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포도원의 비유에서 포도원의 농부들이 주인에게 정직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깨달은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람들이 크게 놀라게 된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하나님께서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른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