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7일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7:24-30
제목: 마음의 편견을 깨고 예수님을 바라보자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다루시는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하다고 하면 그 이유는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이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이방인 여인에게 본문 27절의 말씀을 하셨을까 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요한복음 4장 1-26절의 말씀에 기록되어져 있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인 여인과 예배에 관하여 대화를 나눈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 여인의 입술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을 대하시는 모습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북서쪽의 게네사렛 지역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두로 지역으로 이동하셨습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 이후에 두로의 사람들도 이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나왔다고 마가복음 3장 8절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근거해 보면 이미 두로의 지역에도 예수님께서 전하는 복음의 소식들과 기적들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4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거기를 떠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는 마가복음 7장 17절의 “집”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막 7: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두로의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셨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지난 설교를 통하여 기억해야 하는 것은 “집”이라고 하는 장소가 사적 공간으로서 제자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사용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르치시는 모습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방인의 땅으로 대표되어지는 두로 지역에 가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그 답을 지난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본 장로들의 전통과 관련하여서 찾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에서 시작되어진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논쟁의 결론으로 사람이 먹는 음식으로 더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악한 생각으로 6가지의 복수로 되어져 있는 금지된 행동들의 죄와, 6가지의 단수로 되어져 있는 금지된 생각들의 죄를 통하여 악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음식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까지 확장되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져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는 사건입니다.
결과적으로 두로 지역에서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시는 사건은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현장 실습이 되고 있습니다.
본문 25-26절의 말씀을 보면,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 엎드려서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는 간구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막 7: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우리들은 본문 25절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개념에서 중요한 단어를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더러운 귀신”(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ν)입니다. “더러운 귀신”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마가는 이 개념을 “부정한”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모습을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이 여인의 간절함을 표현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 앞에서 나아오는 표현입니다.
마가복음 3장 11절에서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는 표현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또한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자신이 예수님의 옷 자락을 만진 사건 이후에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5:33).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분명히 알고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마태와(마 15:21-28) 달리 마가는 이 여인이 헬라인(Ἑλληνίς)이고 수로보니게(Συροφοινίκισσα) 출생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가는 왜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까?
이방인(ἔθνος)으로서 이 여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고(God-fearer),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 여인의 간구함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 여인의 딸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고(막 1:26, 5:1-20)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능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막 6:7).
그런데 본문 27절의 예수님의 답변의 말씀을 보면 예상 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막 7: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답변은 이방인으로서 이 여인의 간청에 가혹한 거절의 표현처럼 들립니다. 심지어 유대인을 “자녀”로 표현하면서 이방인을 “개” (κυνάριον)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의 개념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은 “개”와 관련된 현대적인 개념에서 나쁜 이미지를 버리고 1 세기의 성경 시대의 개념과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개는 우리가 생각하는 잡종으로서의 개(curs)나, 야생화 되어진 개(wild scavengers)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개”의 이미지가 돼지나(마 7:6) 이단자(빌 3:2)와 연결이 되기도 하지만, 본문 말씀에서 보면, 이 개는 주인이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여인의 간청이 거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서 시간적 우선 순위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사도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로마서 1장 16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러한 배경에서 보면 이 여인의 대답도 긍정적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순서(divine order)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치(wit) 있는 여인의 대답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시게 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대답은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신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막 7: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마가복음에서 이방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구원 계획은 오늘 본문의 말씀이 처음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레위기의 정결법에 근거해서 먹지 않는 돼지를 키우는 거라사 지역에 방문하셔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고쳐 주시는 사건(막 5:1-20)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신의 딸이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로와 시돈 지역에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이방인 지역에서의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사천명이 먹는 사건들이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전파 되기 시작하였고 복음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태생적으로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있었고,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가복음 7장에서 시작되어진 음식법과 관련된 장로들의 전통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고 새로운 개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더럽게 되는 것은 마음 속의 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도 사라져 버렸고, 이방인들을 향한 전도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복음을 전하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