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 주일 설교
본문: 요한복음 20:21 (신약 184)
제목: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자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절 후 첫 주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로마서 4장 25절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2022년 4월 성경 말씀으로 암송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성도에게 주어진 두 가지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우리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이유는 우리들을 의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복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계 2:10)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네 가지 소망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첫째, 구원의 소망 (살전 5:8)
둘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소망 (롬 5:12-21; 갈 5:5)
셋째, 부활의 소망 (고전 15:52-55)
넷째, 영원한 생명의 소망 (딛 1:2)
여러분들은 이러한 소망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성경에 기초한 소망 가운데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믿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봄 철이 되어서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텃밭을 일구시는 분들의 손길이 분주합니다.
그 이유는 가을의 수확을 위해서 농사를 준비하고 씨앗을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농부의 마음이 봄 철에 씨앗을 심으면서 씨앗이 자라서 가을에 수확할 것이라는 소망이 없으면 농부는 씨앗을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1483-1546)는 탁상 담화(Table Talk)라는 책 가운데에서 “의롭다 함(칭의)에 관하여”라는 내용 중에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 298)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소망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추수의 소망이 없다면 농부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윤이 소망이 없다면 상인이 장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바라는 우리에게 소망이 얼마나 절실합니까?”
우리들의 신앙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한 믿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여 의의 종이 되면 거룩함에 이르게 되는데 거룩함의 열매는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 (롬 6:15-23)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요한복음 20장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통하여 부활의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삶의 태도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지난 부활 주일에 생각해 본 것처럼,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두려움 가운데에서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처음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부활의 증인이 되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고 제자들은 기뻐하였습니다. (요 20:20)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요한복음 20:21-23절의 말씀인데 오늘은 21절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께서는 19절 하반절에 말씀하신 동일한 내용(εἰρήνη ὑμῖν)을 21절에서 다시 말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εἰρήνη ὑμῖ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파송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내용은 ‘보내다’의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은 본문 21절에서 “보내다”라는 동사를 두 가지 다른 단어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사용하는 ‘보내다’ 라는 헬라어 동사는 ‘아포스텔로’ (ἀποστέλλω)인데, 그 의미는 “특별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보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요한일서 4:10절 말씀에서 그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화목 제물로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레위기에 기록되어져 있는 화목 제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이해하면 그 의미를 조금 더 싶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화목 제물이라는 히브리어 명사는 ‘셀렘’(שֶׁ֫לֶם)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샬롬’(שָׁלוֹם)이라는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샬롬’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언약의 관계로 설명이 되어진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언약의 관계에서 예수님께서 새 언약이 되셔서 하나님과 인간의 샬롬을 허락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하신 말씀은 ‘평강’(εἰρήνη; שָׁלוֹם)입니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사용한 펨포(πέμπω)라는 동사는 “대화를 목적으로 누군가를 보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9-18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포도원 농부 비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생각해 보면, 오늘 본문 요한복음 20:21절의 “보내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조금 더 싶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나게 되었고, 추수 때가 되어서 소출을 얻기 위해 자신의 종을 보냅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의 종을 심하게 때렸고 수확의 소출도 주지 않고 다시 보냅니다. (요 20:10)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두 번째 세번째 종을 보내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까지 보냈는데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입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이 그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눅 20:16)는 내용으로 유대인들을 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그러면 문제를 내 보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첫 번째로 종을 보낼 때에 포도원 주인의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보냈습니까? 아니면 대화를 목적으로 보냈습니까?
네 맞습니다. 첫번째로 보낸 종은 특별한 목적 곧 포도원의 소출을 받기 위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세번째 종과 그의 아들은 대화의 목적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보내신다는 의미를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특별한 목적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대화하는 목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우리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늘 암송하고 있는 말씀 요한복음 3:16절,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전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전제 조건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평강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의 일꾼이 되어서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평강을 누리고 계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이러한 복을 누리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