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4일 주일 설교
본문: 마가복음 8:13-21
제목: 예수님을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자
예수님의 전도 사역은 두로에서 시돈과 데가볼리 지방(10개 도시)을 거쳐 갈릴리 호수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지역들 또한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곳에서 청각 장애와 언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 말씀을 우리들은 생각해 보았습니다(막 7:31-37).
그리고 마가복음 8장 1-10절에서 자연스럽게 칠병이어의 사건과 연결이 되어집니다.
우리들은 마가복음 6장 30-44절의 말씀을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살펴보았는데, 이 기적이 일어난 장소는 유대인 지역입니다. 그러나 칠병이어의 사건이 일어난 지역은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이 예수님께 피하는 자, 예수님을 믿고 찾는 자에게 주어진 긍휼하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시비를 걸면서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모습이 마가복음 8장 11절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니라”라고 12절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세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8장 38절의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이고, 9장 19절의 “믿음이 없는 세대”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는 자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죄 가운데에서 믿음이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3절의 말씀을 보면 “그들이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에 가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 14절의 말씀이 본문의 배경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막 8: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본문 15절의 내용입니다.
(막 8: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고, 말씀의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기반하여서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는 내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공관 복음에서 누룩이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마 13:33; 눅 13:20-21), 본문에서 누룩의 이미지는 부정적 이미지입니다.
누가는 누룩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이 되어질 때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 다 함께 누가복음 12장 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눅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누가의 기록을 본문에 적용해 보면, 누룩은 외식을 의미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16장 12절의 말씀을 보면, 누룩이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교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집니다.
누가와 마태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누룩이란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잘못된 교훈과 외식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누룩에 관한 누가와 마태의 배경을 보면 장로들의 전통에 반대되는 예수님의 행동(눅 11:38, 식사 전 손 씻는 법)과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표적을 구하는 행동(마 16:1,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함)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가는 이러한 배경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외식적인 행동과 잘못된 교훈에 반대하여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서 자신들이 떡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것을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막 8: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제자들의 반응을 생각해 보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이 떡을 준비하지 못한 것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막 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둔하다”라고 번역이 되어진 헬라어 동사 “πωρόω”는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마음의 완악함” (막 3:5)과 “마음의 둔함” (막 6:52)입니다.
먼저 마음의 완악함을 말씀하시는 배경은 안식일에 한 쪽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 사건인데, 그 완악한 마음의 배경에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의 전통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으로 지키는 안식일 법의 중요성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완악하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마음의 완악함이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닫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마음의 둔함”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막 6:30-44)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으셨는데, 제자들은 유령으로 생각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막 6:49).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도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닫지 못한 결과입니다.
(막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러므로 마음의 둔함이란 우리들의 신앙 가운데에서 눈과 귀의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막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았고, 들었는데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사건을 언급하십니다.
(막 8: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우리들의 신앙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예수님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것은 삶의 태도를 바꾸어 놓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기억하면 교만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신 8: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또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쉽지만, 듣고 믿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고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막 8: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우리가 말씀을 깨닫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자들은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함께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