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주일 설교 (RWGC)
종려 주일 (Palm Sunday)
본문: 요한복음 12:12-19 (신약 168)
제목: 부활의 주님을 만난 증인의 삶을 살자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공관 복음서와 조금 다른 입장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근처 감란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처럼 한 번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길가에 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면서 외쳤던 음성에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생각 가운데에서 종려 주일로 기억되는 말씀은 공관 복음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져 있는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3; 마 21:3; 눅 19:31)는 말씀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막 11:9; 마 21:9; 눅 19:38)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한 번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와 관련하여서 겸손의 왕을 강조합니다.
공관 복음서 안에서도 누가는 마가와 마태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핵심은 ‘영광’ (δόξα)과 ‘평화’ (εἰρήνη)입니다.
(눅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우리가 누가복음 19:38절을 읽으면 자동적으로 떠 오르는 말씀이 있어야 하는데, 누가복음 2:14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하고 누가복음 2;14절에서 천사들의 찬송 소리가 무엇이었습니까?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렇게 누가는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신 사건과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짊어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영광’과 ‘평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은 다음 종려 주일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오늘 함께 읽고 있는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록하면서 아주 짧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마가와 마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는 장면을 열 한절로 기록하고 있고 (막 11:1-11; 마 21:1-11), 누가는 열 세절로 기록을 하고 있는데 (눅 19:28-40), 사도 요한의 기록을 보면 네 절입니다 (요 12:12-15).
그런데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16-19절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기 전까지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부분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증인들의 기록을 추가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 12:12절의 말씀을 보면 시간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 우리 다 함께 시간적인 정보가 무엇인가를 찾아보시면서 성경 말씀을 읽겠습니다.
(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이튿날은 대제사장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했던 다음날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요한복음 12장 1절에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시간적인 정보를 얻게 되는데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요한복음 12:12절의 말씀은 이틀 후인 종려 주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짜와 십자가에서 죽으신 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수많은 연구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날짜가 유대인 달력으로 니산월 14일인데, 이 날이 유월절 금요일입니다.
그러면 로마 달력으로 니산월 14일이 금요일인 날짜를 AD 27-34년 사이에서 학자들이 계산해 보았는데, 두 가지 가능성을 찾게 되었습니다.
첫째, AD 30년 4월 7일 금요일
둘째, AD 33년 4월 3일 금요일
이 두 날짜 가운데에서 학자들은 많은 논쟁을 가지고 있는데, 조금 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날짜가 AD 33년 4월 3일 금요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짜는 AD 33년 3월 29일 주일로 우리가 이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종려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나와 외치는 자들의 음성이 13절에 기록되어져 있는데 우리 다 함께 읽겠습니다.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먼저 우리들이 꼭 기억해야 하는 단어의 의미가 ‘호산나’ (ὡσαννά)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호산나의 의미는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로 시편 118:25절(הוֹשִׁ֘יעָ֥ה נָּ֑א)의 히브리어 음역을 그대로 헬라어로 읽어서 표현한 단어입니다.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그리고 큰 무리가 외쳤던 내용이 시편 118:26절의 말씀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시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그러면 시편 118:2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누구입니까?
메시아입니다.
시편 118편의 저자는 1절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18편 1절에서 이러한 고백으로 시작한 시인은 메시아에 대한 갈망을 나타내고 나서 시편 118:29절에서 다시 한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믿고 외쳤던 음성이 호산나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한 번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사도 요한은 스가랴 9장 9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을 상기 시키는데, 그 모습을 보면,
메시아는
첫째, 공의로우시며
둘째, 구원을 베푸시며
셋째,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라는 세가지 모습 가운데에서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세번째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을 보면, 사도 요한은 공관 복음서와 다르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사도 요한은 16절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당시에는 제자들이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의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을 찾아보면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과 연결되어져 있습니다. (요 2:22; 20:9)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요 2:19) …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2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또한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 돌 옮겨진 것을 보고 베드와 다른 제자들에게 말을 했을 때에도 그들은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20:9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그러면 사도 요한을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달은 시점은 언제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 이후입니다.
우리들의 모습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종려 주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의 영광을 깨달아야 예수님의 사역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2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17-19절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18절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 함께 한 두 그룹의 증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 12: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첫번째 그룹은 18절에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일이 지난 나사로를 불러 내실 때에 함께 있었던 자들이고,
두번째 그룹은 19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듣고 예수님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공관복음서와 같이 사도 요한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본문 16절에서 끝내지 않고, 17-18절의 추가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본문 17-18절의 말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의 증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함께 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나사로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의 예표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기 위함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복음서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에 추가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여 이르기를 우리들의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19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사실의 증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증인이 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우리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살리셨다는 사실의 증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로운 고난 주간을 보내 시기를 함께 기도 드립니다.